공대생의사랑이야기

글/그림 : 바다의기억

피아노 위에 태권도 <54화> 결승

방학도 이럭저럭 반이 지나고

얼마전 수강신청을 마쳤습니다.

이제 올빼미 스타일로 바뀐

일과를 바로잡아가야겠네요.


=========================== 겨울 방학때 그랬던 것처럼 ===========================


결승전 진출권은 확보했지만

태룡이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고작 한 두 시간 사이에 다친 발목이 나을 리도 없고

이미 한 번 써먹은 목도리뇌조 작전이

다시 통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태룡이 결승전 상대는 누구죠?”

“부천의 김왕장 선수예요.
아직 1학년이라 고교대회 실적은 없지만
중학교 시절 두 차례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어요.
기초가 워낙 탄탄하고 재능도 있는 선수라
내년엔 고교선수권 제패도 가능할 거예요.”

“갈수록 깜깜해진다, 갈수록 깜깜해져...에휴”


대진운이 나쁜 것도 정도가 있지

붙는 상대마다 전국, 전국, 전국이니....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건 용하지만

이제는 정말 포기할 때가 된 것 같다.


“태룡아, 기권하자.”

“....... 싫어요.”

“인마,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부상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둑에 금이 갔을 때 서둘러 막으면 고칠 수 있지만
내버려 두면 둑 전체가 무너지는 거야!”

“관장님, 관장님 영광의 시대는.....!”

“시끄러 인마!
한 번 써먹었으면 됐지 같은 수를 또 써먹으려고.....”


난 또다시 영광의 시대 운운하며

억지를 쓰려는 태룡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혹여 남아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했다.

하지만 힐링이니 큐어니 하는 회복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세계가 아닌 다음에야

결승전까지 태룡이의 발목을 완치시킬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더 큰 부상을 무릅쓰고 승산 희박한 결승전에 나갈지,

아니면 훗날을 기약하며 한 번 눈물을 삼킬지

결단을 내릴 뿐이다.


태룡의 나이 이제 열아홉.

비록 한 동안 방황하며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재능도 패기도 넘치는 유망주다.

이제 막 날아오르는 법을 배운 탓에

무작정 퍼덕거리려 하고 있지만....

지금은 어린 날개가 다치지 않게

‘적당히’란 말을 가르쳐 줘야 할 시기다.


하지만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태룡이의 사기를 꺾지 않으면서

이날의 분함을 앞날을 향한 투지로 돌리고

부상방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임태룡 선수 맞죠?”

“예...그런데요.”


흰색 바탕에 어깨선을 따라 노란색 줄무늬가 있는

긴 점퍼를 맞춰 입은 아저씨와 학생 둘.

척 봐도 어느 학교 운동부가 분명한 모습에

난 그가 김왕장 선수의 지도교사임을 직감했다.


“발목 부상이 있다면서요?
결승전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요?”

“다...당연히 나가야죠!”

“이런... 젊은 혈기도 좋지만
두고두고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임태룡 선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희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갑작스럽게 남의 진영에 찾아와

대놓고 저주를 퍼붓는 그들의 행태에

하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었던 나.

물론 나도 태룡이에게 기권을 권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결정할 일이지

상대편에서 종용할 일은 아니었다.


“이보세요, 지금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아~ 이거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관장님께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부천강명고교 코치를 맡고 있는 김태균이라고 합니다.”

“.....참태권도장 김은희입니다.”

“김은희 관장님이라면,
사랑의 힘으로 절망을 딛고 일어서....의
그 김은희 관장님이신가요?”

“.....예, 그 김은희는 맞습니다만
일단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아아~!! 그 인터뷰 기사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전 국기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봤는데
너무 감명 깊게 읽어서
운동부 아이들한테도 한부씩 뽑아다 나눠줬었습니다.”

“.....국기원 홈페이지요?”

“예, 국기원 홈페이지뿐인가요?
태권도 관련 홈페이지라면 다 떴을 겁니다, 아마.
태권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쩐지 포털 사이트에 잠깐 뜬 것 치고는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있다 했더니

여기저기 안 퍼진 곳이 없었구만....

이놈의 기자를 잡아다 아주 그냥.....


“아무튼 이렇게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언제 뵈도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아니 별 말씀을......
어찌됐건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그게 아니라....”

“예예 저도 압니다.
김관장님께서도 부상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으셨으니
누구보다 임태룡 선수를 말리고 싶으시겠죠.
다만 저희도 같은 마음으로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고 싶을 뿐입니다.”

“.......”

“이미 알고 계신지도 모르겠지만
저희 왕장이는 이미 두 차례나 중학선수권을 제패한 바 있는
엘리트중의 엘리트 선수입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전 경기 무실점에 3득점 이상을 하며
완벽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었죠.
물론, 임태룡 선수의 전경기 KO 승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꽤나 힘들었던 경기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저희 태룡이가 본래 위기 상황이 닥쳐야
잠재력을 드러내는 실전파 선수라....”

“잠재력이라면 목도리뇌조 작전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건 단지 하나의 전략으로.....”

“물론 페이크도 기술이라면 기술이겠지만
승리를 위한 집착만큼은 왕장이도 지지 않을 겁니다.
임태룡 선수가 발목 부상을 입었다는 걸 안 이상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아래 막기도 이렇게 힘을 줘서 팍! 팍! 내려칠지 몰라요.”


아예 대놓고 ‘우리는 이렇게 하겠다.’라고 말하듯

강명고교의 코치는 옷깃 소리가 나도록

아래 막기 동작을 취해 보였다.

확실히 발목 부상을 입은 다리를

저렇게 힘줘서 막으면 꽤나 아플 것이다.


“모쪼록 이번 대회가 피차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현명한 결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임태룡 선수도 꽤나 장래성 있어 보이던데
못 다 이룬 꿈은 대학에 가서 마저 이루면 되지 않겠어요?”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태룡이의 몫이니
이만 돌아가주세요.”

“예 그럼, 이만 실례 많았습니다.
...... 모쪼록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강명고교의 코치와 선수들은

선수 대기실 쪽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피아노 아줌마와 한선생은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버럭 역정을 내며 말했다.


“어머머머, 대체 저 사람 뭐예요?
완전 재수 똥에 매너 황이다~!”

“확실히 그러네요.
저도 선수들 뒷사정까지는 잘 모르지만
저렇게 대놓고 기권하라고
찾아오는 경우는 처음 봤어요.”

“태룡아, 절대 기권하지 마!
정말 기분 나빠서라도 본때를 보여줘야지
팍! 팍!은 무슨 얼어 죽을 팍팍이야?
그 정도에 쫄아서 기권할 것 같으면
차라리 고추를 떼버려!”

“어머 어머 원장님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과격하게....
그냥 ‘남자이길 포기해라.’이러면 될 걸....”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일까?

정말로 상대편 선수를 걱정해서 온 것일 리는 없다.

부상을 당한 상태라고 해도

연속해서 KO 승을 거둬온 태룡이의 저력을 생각해

안전하게 승리를 보장받고 싶었던 걸까?

... 아무튼 뭔가 뒤가 구린데다

이대로 앞날 창창한 태룡이를 고자로 만들 수도 없으니

그 꿍꿍이속을 한 번 알아봐야겠다.


“태룡아,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기권할래?”

“.....네.”

“.....네?! 기권한다고?”


기껏 싸우기로 마음을 굳히고

태룡이의 전의를 확인하고자 물어본 질문에

너무도 맥없는 대답이 나오자

나의 정신적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 기권할게요.”

“야 이 자식아 방금 전까지
영광의 시대 어절씨구 하던 놈이
갑자기 왜 맥이 빠졌어?!”

“그렇지만 상대편이 그러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막겠다고....
이미 다친 것도 다 들켰고
그걸 물고 늘어지겠다는데 어떻게 싸워요.”

“이런.....씨...... 한선생! 가위 없어요? 가위?
거시기 꺼내라 자식아 확 잘라버릴랑께!”

“아 관장님도 계속 기권하라고 하셨잖아요!
저라고 안 분한 줄 아세요?
기껏 관장님 말씀 듣기로 마음 정했는데....”

“타이밍이 글렀잖아 자식아!”

“관장님! 가위 여기 있어요.”


그렇게 한참을 투닥거린 끝에 분위기가 진정된 우리.

결승전은 10여분 앞으로 다가왔고,

내 손엔 스포츠테이핑의 재료들이 들려있었다.


“상대방이 네 기권을 바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기권패도 허무하지만 기권승도 허무하긴 마찬가지니까....
실력에 자신 있다면 정면승부를 원하겠지.
순운발처럼 실적에 비해 실력은 꽝이라거나
아무튼 뭔가 구린 구석이 있어.”

“아니에요, 관장님. 지금 제 정보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기초가 탄탄한 선수라니까요....”

“아무튼 지금은 뭔가 구리다 이거예요!”

“.....네. 칫.”

“스포츠 테이핑을 완전히 단단히 해서 나가면
2라운드는 뛸 수 있을 거야.
그 사이에 그 구린 구석이 뭔지 찾아내면 싸워 보는 거고
이대로 도저히 싸울 상대가 아니다 싶으면
그때 기권해도 늦지 않아.”


제대로 된 스포츠테이핑의 효과는 의외로 굉장하다.

다친 관절 부위에 적절한 조치만 해주면

침 맞는 것 이상으로 진통효과와 운동능력 회복 효과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운동을 시키거나 해선 안 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한 번쯤 와일드카드로 써볼 수 있다.


“자, 다됐다! 살짝 한 번 움직여 봐.”

“....오! 안 아파요 관장님!”

“좋았어, 시합이 시작되면 일단 상대방의 동태부터 살펴봐.
절대 처음부터 먼저 공격하지 말고,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진 않나
그것부터 살펴보란 말이야. 알았지?”

“옙!”

“좋았어, 시간 됐다, 나가자!”


지금 내가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걸까

확신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부턴 태룡이를 믿는 수밖에.....


“청, 홍, 차렷, 경례!!!”


결승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시작되었다.

단단한 테이핑으로 발목이 고정된 탓에

태룡이의 스텝은 평소보다 많이 무거워 보였지만

그래도 꽤나 부지런히 상대와의 거리를 재며

충실히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상대는 언뜻 봐도 균형 잡힌 몸에

좋은 눈빛을 가진 선수였다.

어린 선수 같지 않게

신중히 태룡의 공격을 기다리며

확실한 득점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합 전에 태룡이에겐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 두었으니

기다리기만 해선 승부가 나질 않을 것이다.


“청, 경고! 홍, 경고!”


대치 상황이 너무 길어지자

심판은 두 사람에게 각각 경고 하나씩을 선언했다.

시합 게시 30초가 지나도록

발차기 한 번 나오지 않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관장님?’


경고를 받고 돌아서며 나를 바라보는 태룡에게

난 고개를 저어보였다.

절대 먼저 공격해선 안 된다.


“.....슉 끽!”


결국 50초를 지날 무렵에야

김왕장선수의 첫 공격이 튀어나왔다.

기묘한 기합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전광석화와 같은 나래차기.

나조차 깜짝 놀랄만한 거리를 순식간에 도약해

탄력 있게 공중에서 발을 엇가르는 모습에

난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방의 공격만 기다리고 있던 태룡은

다행히 반격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몸통을 향해 날아드는 상대의 다리를 강하게 막은 뒤

테이핑 된 오른발로 뛰어 뒤차기를 시도했다.


‘투닥! 퍽!’


도복과 도복이 스치고

호구와 손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 차례 귓가를 스쳤다.

공중에서 벌어진 접전에 두 선수는 모두 바닥에 떨어졌고,

다음 순간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악!!”

“태룡아!!!”


황급히 경기장으로 뛰어 올라가는 동안

난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내가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예?”

“.....응?”


몇 번이나 발을 헛딛어 가며 도착한 경기장에서 나를 맞이한 건

멀쩡하게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태룡이었다.


“....... 태룡아, 발목은, 발목은 괜찮아?”

“예, 그런데요.”

“야 이 자식아, 그런데 왜 비명을 지르고 그래!!
사람 간 떨어지게!”

“제가 지른 거 아니에요, 상대편 선수가 그런 거예요.”


태룡의 말에 여전히 띵한 상태로 돌아본 오른쪽에선

한차례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이고~ 왕장아~ 괜찮냐?”

“으으윽.... 감독님.... 발목이.....”

“그러게 자식아, 내가 그렇게 기권하라고 했건만...”

“죄송해요....죄송해요 감독님....”


이런 약아빠진 인간들이......


임태룡, 경기도대회 우승. 1부전승 5KO 1기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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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피아노 위에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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