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사법농단의 목격자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기사입력 2019.07.18 05:00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 15차 공판서 전 외교부 직원 증언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2016년 9월 28일. 외교부 국제법규과에 근무했던 김모 변호사는 박모 국장의 호출을 받았다. 내일 법원행정처 사람이 방문하기로 했으니 면담에 배석하라는 지시였다. 법원행정처에서 외교부를 찾아온다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과 동료인 정모 변호사가 대법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로 피곤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윗선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였다.


이튿날 나타난 법원 손님은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 등 3명이었다. 임종헌 차장은 낯이 익었다. 사법연수원 때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났다. 외교부에서는 김 변호사와 조태열 차관, 박 국장이 차관실 옆 접견실에서 이들을 맞았다.


얼마 전 인사에서 영전한 조 차관을 놓고 덕담이 오가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이야기는 임 차장이 주로 끌어갔다. 역시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가 화두였다. 4년 전 판결을 뒤집기는 쉽지않고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 내 결론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돼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그러려면 외교부 의견서가 계기가 돼야한다는 말이었다. 11월초까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 소멸 입장을 인정하는 취지의 의견서를 보내주면 법원 내부 절차를 최대한 진행해보겠다고 했다. 외교부가 '아미쿠스 쿠리에'(라틴어로 법정의 조언자)가 되라는 소리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법원행정처는 2015년 외교부가 의견서를 낼 수 있도록 민사소송 규칙도 개정해놓았다.


임 차장은 의견서에 주석과 팩트를 많이 넣어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이전까지 외교부는 강제징용 판결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소극적이라는 인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오늘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진행된 것 같았다.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4년 전인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가 전범기업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어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전범기업은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신일본제철은 불복하고 재상고 했다. 그뒤로 대법원은 차일파일 판단을 미뤄왔다.


김 변호사는 놀랐다. 이렇게 의견서 제출을 비공개로 협의한다는 것 자체가 그랬다. 공개된 법정에서야 사건 관계인들이 재판 절차를 놓고 논의하기도 한다. 외교부에 오기 전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이런 자리는 정말 낯설었다. 상식적으로 공정한 재판 진행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법조인으로서 기본이라고 믿어온 것에 회의를 느꼈다.


면담은 20~30분만에 끝났다. 김 변호사는 박 국장에게 다시 지시를 받았다. 면담 내용을 구술할테니 정리해서 간단한 보고서로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럴 것 같아서 노트를 갖고 들어가기도 했다. 다 썼더니 A4 용지 한 장 분량이었다. 한 장은 국장에게 제출하고, 파일은 원래 업무 담당자인 정 변호사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말했다. "전 (이 문제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네요."



'재판 거래'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성남=임영무 기자

김 모 변호사는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15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증인 중 현직 판사가 많아 출석이 하늘의 별따기인 이 재판에 오랜만에 나온 증인이었다.


그때 임종헌 차장은 왜 양승태 대법원장의 임기를 언급했을까. 김 변호사는 "가급적 이 문제를 대법원장 임기 내 처리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11월까지 외교부 의견서를 희망한 것 같다"고 짐작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임기는 2017년 9월 24일까지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반대신문을 통해 김 변호사의 증언을 탄핵하려 했다. 법원행정처가 아니라 외교부가 강제징용 사건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회부를 추진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의심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에 외교부 의견도 들어갔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다른 질문에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신중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 부분 만큼은 "임종헌 차장이 말을 먼저 꺼냈고 그런 취지로 말했다"고 잘라 말했다.


재판부는 이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기한 만료일(8월 10일) 전 직권 보석을 검토할 뜻을 밝혔다. 검찰은 대신 증거인멸 우려를 없애기 위해 법원이 지정하는 일시·장소에 출석할 것을 서약 상당 금액 납입 약정 기존 주거지로 주거 제한 법원 허가 없이 여행·출국하지 않는다는 서약 가족·변호인 외 접촉 금지 및 공범·사건 관계자 직간접 접촉·연락 금지 검사·단체의 수시 감독 승인, 보호감독 조치 준수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구속 만료를 앞두고 조건이 붙은 보석은 적절하지 않다"고 반대 의사를 밝혔다. 양 전 원장 입장에서는 구속 만료로 석방되면 활동에 별 제약이 없지만 보석은 많은 조건이 붙어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단점이 있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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