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첫 주.
갑작스러운 생활패턴 변화로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는 요즘입니다.
================================= 이제 자야하는데 정신이 맑아지고 있다 =============================
초고속 선수를 상대로
기적적인 KO승을 따낸 나.
순발력과 지구력, 판단력을 고루 갖춘
초고속 선수의 유일한 약점은
정권지르기에도 무너지는
모래성 맷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선생에게 3라운드까지의 부진과
자신의 조언이 맞았음에 관한 일장 연설을 들으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태룡이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관장님, 회심의 붕권! 진짜 멋있었어요!”
“뭐, 뭔 권?”
“붕권이요! 오아~~ 뿌악!!”
“...... 붕권은 무슨 놈의 붕권이야, 인마.
그냥 정권지르기지.”
“에이 그게 어떻게 정권이에요.
얍, 얍 이게 정권이지.
오아아~~! 이건 붕권! 아니, 통배권인가?
오아아~! 오아아아~! 뿌악~!”
오락실 모 게임의 캐릭터 흉내를 내며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는 태룡이에게
가볍게 꿀밤 한 대를 먹여준 난
다음 상대를 확인하러 게시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벌써 결승전이네요.”
“일반부는 출전 선수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불공평해요! 전 여섯 경기나 싸웠는데...”
“....뭐가 또 불공평해? 내가 결승전에서 너랑 붙냐?
정 꼬우면 네가 스물여덟하든가. 내가 열아홉 할게.”
“..... 피.”
결승전 상대의 이름은 ‘안선희.’
별 특징이 보이질 않는 평범한 이름이었다.
“태룡아 넌 이 이름 보고 뭐기 느껴지니?”
“글쎄요, 약간 여자이름 같다는 거?”
..... 아무리 그래도
설마 여성스러운 게 특징인 선수는 아니겠지?
“한선생님은 뭐 아는 거 없어요?”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필요하시면 지금이라도 알아보고요.”
“음... 그러면 좋기야 하겠지만
경기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가능할까요?”
“맡겨만 두세요!”
대체 무슨 비책이 있는지는 몰라도
정보수집을 해오겠다며 자리를 떠난 한선생.
태룡이는 또다시 붕권 연습에 한창이었고
남은 건 피아노 아줌마뿐이었다.
“이제 한 경기만 더 이기면 목표 달성이네요?”
“음... 그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겨야죠.”
“우승 말고 목표가 또 있어요?”
“도대회 우승하면 전국 대회도 나가봐야죠.
이왕 시작한 거 끝은 봐야하니까
질 때까지 이기는 게 목표예요.”
“...... 왠지 멋있네요, 그 말.”
“예? 무슨 말이요?”
“질 때까지 이기는 게 목표라는 말.”
“그런가? 절대 안 진다거나
무조건 이기겠다는 게 더 멋있지 않아요?”
“음.... 아닌 거 같아요.
그런 말은 그냥 호기로 들리는데
질 때 까지 이긴다는 건
할 수 있는 데까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들려요.”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대로라면
6:0이 뭐냐, 결승전은 10:0으로 지지 않게 조심해라
악담만 실컷 늘어놓을 것 같은 아줌마가
격려와 존경의 빛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쩐지 멋있다.’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서있던 난
피아노 아줌마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 원장님도 대회 많이 나가 봤죠?”
“무슨 대회요? 피아노요?”
“아무려면 태권도 대회 나갔냐고 물어볼까 봐요?”
“에...뭐.... 중학교 때까진 종종 나갔어요. 상도 많이 탔고.”
“....... 고등학교 때는요?”
“음.... 처음엔 몇 번 나갔는데 상도 못 타고 해서
그냥 공부했어요.
연습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애들이 갑자기 실력이 늘어서 그랬는지....”
“에고, 어째 분위기가 암울해졌네. 괜히 물어봤나?”
“아녜요, 이미 한참 지난 일인데요 뭐.”
“대학은 어떻게 했어요? 음대 쪽으로 갔어요?”
“아뇨, 엉뚱한 곳에서 4년 보냈어요.
졸업해서도 3년 동안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흘려보내고......
피아노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죠.”
한참 지난 일이라고 웃어넘기기엔
너무도 침울해져버린 피아노 아줌마의 얼굴.
서른 살을 살았다고 해도
자기 뜻대로 갈 길을 정한 건 10년 남짓인데
그 중 7년을 허송세월 했다 생각하면 침울해질만하다.
“많이 후회되시나 봐요? 음대를 택하지 않은 게.”
“아뇨, 옛날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군화 거꾸로 신고 튄 애인 새끼랑
회사에서 과장이랍시고 찝쩍거리던 놈팽이가 생각나서....”
“.... 그것 참 유감이네요.”
무슨 대단한 수심에 잠겼나 했더니
옛 남자친구랑 직장 상사 생각이었냐....
“그래도 어떻게 피아노로 돌아올 생각을 하셨네요?”
“좋아하니까요. 한참 헤매고 나니
생각나는 게 피아노 밖에 없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것도 운명이겠죠.”
...... 지금의 나도 그렇다.
한참을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태권도로 돌아왔다.
좋아하니까. 어떤 형태로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건 다행인 것 같아요. 그렇죠?”
“네, 그럼요.”
둘 사이엔 미묘한 공감대가 흐르고 있었다.
물고 뜯고 싸우는 분위기보단 나았지만
그래도 영 어색하기만한 낯선 분위기.
이 분위기는 또 어찌해야하나
팔짱낀 손만 옴찔 거리고 있을 때
한선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김은희 선수~! 상대 선수에 대해 알아냈어요!”
“오호, 그래요? 어떤 선수인데요?”
상대선수에 대한 정보도 반가웠지만
일단은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했다는 게 더 반가웠던 나.
하지만 한선생이 들고온 정보는
완전히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안선희. 본명 앤쏘니 스트롱맨(Anthony Strongman).
서른한 살의 미국인이에요.
작년에 한국 국적을 얻었고
부천에서 원어민 강사를 하고 있으며
도대회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 앤쏘니? 앤쏘니라서 안선희야?”
갑자기 글로벌해진 결승전에
난 실소를 터트렸다.
평범한 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나....
그래도 여성적인 것 보다야 낫지.
“까짓 거 뭐, 양키랑 붙는 게 처음도 아닌데 긴장할 거 없지.
그 외에 또 알아낸 거 있어요?”
“음....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전부 기권승으로 올라왔다고 해요.”
“.....엥? 무슨 제2의 순운발이라도 돼요?”
“아뇨, 그런 기권승이 아니라
상대선수들이 전부 팔에 부상을 입어서......”
“어쩌다가요?”
“그냥 경기중에요.”
어쩌다가 상대 전부가 팔에 부상을 입었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영문이었지만
상대가 외국인이라는 걸 안 것만으로
꽤나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아무 준비 없이 나갔는데
노란머리 양키가 서있으면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좋~았으. 코리아 태권파워를 보여주지.”
그렇게 다짐하고 한 시간 뒤 결승전은 다가왔다.
경기장에 가기 위해 대기실 앞을 지나는 길.
태권도복을 입은 외국인이
운동점퍼를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쏘니, 음.... 상대가.....”
“Sunday?"
“노노, 상대, 그니까 에너미, 에너미.”
“Ok, Enemy. and?"
“....... 에너미가, 유, 어택하면 카운터, 오케이?”
“I got it, master.
And anything else that I should take to heart?"
“어, 어..... 파이팅!"
“Roger.”
잘 벌어진 골격.
서양인 특유의 두터운 허벅지와 골반.
반쯤 걷은 소매 밑으로 드러난 엄청난 양의 털.
딱 봐도 양놈이라고 티가 나는 그.
작년에 한국으로 왔다더니
한국어 실력은 별로인 듯
코치들과 전략수립에 문제가 있어보였다.
과연 ‘공격하면 받아쳐라’라는 전략만 가지고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모른 척 스쳐지나가려는 순간
안선희 선수가 나를 불렀다.
“Oh, 은희 킴!”
“...... 응?!”
"My name is 앤선휘, your counterpart of the final match."
알 수 없는 영어를 솰라솰라 거리며
나에게 손을 내미는 그.
손등과 손가락에도 머리카락이 난 것 같은 게
과연 양놈티가 났다.
“어..... 나이스투미추. 앤...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쉬.”
“Don't be shy. You speak english pretty well."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했음에도
뭐라 뭐라 계속 지껄이는 녀석.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영어는
‘What the fuck?' 이었지만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아 참았다.
“음.... 씨유레이터. 인 더.... 뭐였지? 아, 파이널 매치.”
“Ok, see you then. I'll do my best.
I want you come up to my expectation. Bye!"
방금 ‘바이’라고 말했으니 이제 가면 되는 건가?
혹시 내가 욕을 먹고도 그냥 가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든 나였지만
설마 웃는 얼굴로 욕했을까 싶어 그냥 가기로 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뒤따라온 한선생이 내 옆에 다가와 물었다.
“방금 안선희 선수예요?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몰라요, 영어로 솰라솰라 하는데...”
“그래도 뭐라뭐라 말씀은 하셨잖아요.
기억나는 말 없으세요?”
“....프리티? 유 프리티 뭐 그러던데.”
“프리티요? 예쁘단 뜻이잖아요?”
“...... 에?!”
“다른 말은 없었어요?”
“...... 뭐 있었지? 아이 원 츄?”
“예에?! 관장님을 원한다구요?”
“...... 뭐?! 그게 그런 뜻이었어?”
“외국엔 동성애가 드문 일이 아니라던데......”
“아....갑자기 기분 더럽네....
오냐, 이쁜이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역시 아까 What the fuck을 썼어야 했나
마음 속 깊이 후회하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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