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에 웨이크 보드 타러 다녀왔습니다.
대략 골반에서 허리까지
근육통이 엄습하네요.
그래도 올 여름은 참 재밌게 보낸 것 같습니다.
----------------------------- 물은 생각보다 단단하더군요 -------------------------
찜찜한 기분과 약간의 긴장감이 뒤섞여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나.
시합까지 이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컨디션은 썩 좋은 편이 못 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기권할 생각은 없으니 나가서 싸워야지.
“쯔으어짜자짜~!!!”
옥탑방을 나와 시린 겨울바람 속에 기지개를 펴며
오늘의 각오를 새롭게 다진 난
깨끗하게 빨아둔 도복을 챙겨들고
봉고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관장님, 나오셨습니까!”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봉고차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하는 태룡이.
힘든 시합에다가 한 바탕 난리까지 겪어
많이 피곤했을 텐데 용케 나온 것 같다.
“오늘 병원이나 가보랬더니 뭐하러 나왔냐.”
“아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관장님 시합인데 보러 가야지요.
제가 안 보러 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한선생 있잖아, 한선생.
그 선생님은 네가 아니라
상대편이 안 와도 보러 올 사람이야.”
“...... 관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그런 열성 팬도 있고.”
“좋긴 뭐가 좋아? 가끔은 겁이 난다, 인마.”
출발에 앞서 유리창에 뽀얗게 앉은 서리를 닦으며
그런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문득 겨울바람보다 찬 기운이 목뒤를 스치며
살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유~ 그러셨어요? 그럼 가지 말까요?”
“....하, 한선생?”
“저도 왔어요~ 관장님.”
“두, 두 분 다 어쩐 일로...허허허.”
“어쩐 일은요, 관장님 시합 보러가려고 왔죠.
상대편이 안 와도 보러갈 관장님의 열성팬이잖아요.
가끔은 무서운.”
....아마 지금이 그 가끔인 것 같다.
살얼음 위를 스노모빌을 타고 달리는 기분으로 도착한 대회장.
바로 어제 왔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합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니 새삼 다른 느낌이었다.
대회장 입구는 어제보다 한결 한산한 편이었다.
일반부는 학생부에 비해 출전 선수도 적고
학부모나 코치진 같은 관중들도 적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선수대기실에 들러 등록을 마친 후
우린 경기장 근처에 붙은 대진표를 확인하러 갔다.
미들급 참가 선수는 7명.
운 좋게 1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선수는
2번만 이기면 우승이었다.
“음...관장님 1차전 상대는 곽두기 선수네요.”
“어떤 선수인데요?”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
아마 이번이 첫 출전인 것 같은데요.”
“곽두기... 곽두기..... 갑자기 어제 생각나네.”
“....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뭐, 별 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냥 사소한 마찰이 좀 있었달까....
그렇지, 태룡아?”
“예? 아...예.”
“곽두기..... 거 참 이름 묘하네.”
어제 밤의 소동 이후
내내 찝찝함을 떨어내지 못하고 있던 난
잠시 대진표 앞에 서서 상대의 이름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한 남자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마가 남으 성님 존함을 그래 함부로 불러쌌노!”
일단 말투 자체도 위협적이었지만
묘하게 낯익은 사투리와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
뒤돌아 본 그곳엔
어제 식당 앞에서 마주쳤던 조폭 일당이
고스란히 버티고 서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신의 장난일까.
“니가? 니가 우리 성님 존함을 그래 막 불렀나?”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만.”
“와 부르노? 니가 뭔데 남으 성님 존함을
그래 막 부르노 말이다.”
“그냥....제 첫 경기 상대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열 낼 일 아니니 목소리 낮추시죠.”
“...... 내가 목소리를 낮추건 말건 그거야 내 맘이지!
가만, 이노마 지금 보이 어제 그노마 아이가?”
그제야 상대방도 우리를 알아본 듯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딱히 원수랄 건 없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였다.
“막내야, 괜히 소란 떨지 말고 나와라.
거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성님, 맞죠 맞죠, 어제 그노마들 맞죠?”
“맞으면 어쩔 거고 아니면 또 어쩔 거냐.
같은 땅덩어리에 살다보면
어제 만난 사람 또 만날 수도 있는 거지.”
과연 오늘의 참가 선수가 맞는 듯
도복위에 검은 정장을 걸치고 있는 우두머리.
언제나처럼 한 발 늦게 나서서 상황을 진정시킨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에게 다가왔다.
“.... 거참 이것도 묘한 우연입니다.”
“그렇네요.”
“.....첫 경기 상대라고 했죠?
열심히 한 번 해봅시다.”
툭툭- 인사치레로 어깨를 가볍게 치고
그는 무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요샌 조폭들도 태권도 대회에 나와요?”
“......글쎄요, 요즘 취업난이 워낙 심각하다잖아요.
이력서에라도 쓰려나보죠.”
“완전 웃기네, 저 사람들....
관장님, 이 기회에 확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줘요!”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났는지
피아노 아줌마와 한선생은 연신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나의 건투를 기원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시합도 시작하기 전에 기다리다 녹초가 돼버렸던
어제의 일을 교훈 삼아
잠시 대회장 근처에서 차를 마시다 들어왔을 때
경기장 주변엔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으싸! 으싸~으싸!
우린 형님 포스를 느낄 수 있슴다 으싸! 으싸~으싸!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으싸! 으싸~으싸!
우린 언제나 형님 곁에 있겠슴다~ 으싸~으싸!!”
....... 뭐냐 저 관중석 한쪽을 가득 채운 깍두기 부대는.
“......곽두기 선수 응원 왔나 본데요?”
“아저씨들 민폐 진짜 제대로다....”
“...... 관장님 잘못하면 인천 앞바다에 잠기는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조폭 중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인지
고만고만하게 생긴 덩치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을 들으며
경기장으로 올라서는 곽두기 선수.
운영진에선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시도를 해보았지만
다짜고짜 웃통부터 벗고 덤벼드는
그들의 배짱엔 당할 재간이 없어보였다.
“형님~~!!”
“파이팅~~!!!!!!”
“파도타기 응원 준비~! 으다다다다~!!!”
“우워우어어어어어어어~!!!!”
.....가지가지 한다, 진짜.
한편으로 기가 차서 웃기면서도
살기가 번뜩이는 깍두기 군단의 응원에
나중에 정말 해코지 당하는 건 아닐까 겁도 났다.
내 태권도 인생 20년에 이런 일도 겪는구나....
“우리 애들이 기운이 좀 넘치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저러네요.”
“......허허. 마음고생이 심하시겠네요.”
......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길게 생각할 시간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일단 상대가 태권도복을 입고
정당한 시합선상에 나온 이상
나는 한 사람의 태권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그를 상대해야 한다.
그가 시합에서 졌다는 이유로
뒤에서 해코지할 만큼 덜 되 먹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지금 시합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청, 홍, 경례! 시작!!”
“형님~~ 파이팅~!!!!”
개시 구령이 울리는 순간
관중석에선 또다시 대회장이 떠나가도록 응원소리가 울렸다.
다른 관중들이나 경기장에 있던 선수들,
심지어 심판들까지도 깜짝 놀라 움찔하는 사이
난 빠르게 반스텝을 딛고 들어가 돌려차기로 선취점을 따냈다.
“빠셍~~!!!”
팡! 하고 경쾌하게 호구 치는 소리가 울리는 순간
다시 한 번 아수라장이 되는 관중석.
“저런 #$! 새끼를 봤나~!! 확 발모가지를 모사버릴랑게!!”
“너 이 $%^# #%$#% 싶냐!
어서 배워먹은 싸가지여~!!”
“형님, 저런 놈은 제가 그냥 훑어버리겠습니다 형님!!!”
과연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격렬한 반응인걸....
만약 지금 핸드폰을 쓸 수 있다면
태룡이와 한선생들에게
시합 끝나기 전에 멀리 도망치라고 말해줄 텐데.
“....후우.....”
하지만, 난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고,
난 태권도인 김은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할 것이다.
“..... 후웁. 아다~! 아다, 빠셍!!”
태룡아,
만약 내가 인천 앞바다에서 떠오르면
잘 건져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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