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무척 좋아했던 저는 가장 좋아하는 야구 선수로 항상 박찬호 선수를 꼽았습니다.
뭇남성들 중 공감되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저 역시 박찬호 선수 경기 모습이 담긴 비디오의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수백 번 돌려 봤고
투구 폼을 따라 하면서 박찬호 선수처럼 공을 던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선수이지만
온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던 IMF 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며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준
박찬호 선수. ‘최초’와 ‘최고’라는 수식어는 언제나 박찬호 선수와 함께했죠.
박찬호 선수는 공주고등학교 진학 후 공에 대한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 공동묘지에 가서
스윙 훈련을 하거나 하체 단련을 위해 공주산성을 토끼뜀으로 오르내렸다는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야구선수는 가장 재미있고 가장 행복한 것이 바로 야구여야 한다”라는
박찬호 선수의 이야기 뒤엔 또 다른 노력의 과정이 숨어있었습니다.
그는 공주중동초등학교 때부터 등 번호가 계속 16번이어서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도 16번을 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구단 투수 코치였던 론 페라노스키가 오랫동안 16번을 달고 있었기에 16을 뒤집은 61을 달게 되었죠.
이듬해 입단한 박찬호의 경쟁자 노모 히데오가 16번을 달았지만,
박찬호는 LA 다저스에서 달았던 숫자 61을 레인저스, 파드레스,
메츠, 필리스, 양키스, 파이어리츠에서도 계속 달고 있었고
마지막 한화 이글스에서도 61번을 달며 박찬호의 상징번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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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대한민국 첫번째, 메이저리거가 되었다”라는 박찬호 선수
그가 코리안 특급이 되기까지의 노력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일궈낸
값진 결과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수 ‘박찬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우상인 박찬호 선수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박찬호선수의 숨결을 간접적으로 남아 느낄 수 있었던 그레뱅 뮤지엄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박찬호 선수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기원하며!!
출처 : MLBPARK
박찬호 특별전 http://blog.naver.com/grevinseoul/221079702522